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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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의 간도 출병 계획에 맞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을 중심으로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했다. 전투 결과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며, 한국 측은 독립군의 승리로, 일본 측은 자국군의 피해를 축소하여 발표했다. 이범석의 회고록 왜곡 논란, 전사상자 논란 등 논란이 있으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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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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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청산리 전투 |
관련 분쟁 | 한국 독립 운동 |
날짜 | 1920년 10월 21일 ~ 1920년 10월 26일 |
장소 | 중화민국 길림성 칭산리 |
결과 | 불확정적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육군 |
교전국 2 |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대한북로군사령부 |
지휘관 | |
일본 제국 | 다카시마 도모타케 아즈마 마사히코 이소바야시 나오아키 기무라 마스조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조안무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30,000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약 3,000명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일본 기록) | 전사: 11명 부상: 24명 |
일본 제국 (한국 주장) | 전사: 812~1,200명 부상: 3,300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전사: 60명 부상: 90명 |
2. 전투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에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독립군 부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진압해 줄 것을 중국에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8][9][10]
1920년 10월 2일, 독립군은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은 동만주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6일 지린성 성지사로부터 군사 행동 허가를 받았다.[11][12][13] 대한민국은 훈춘 사건을 일본이 병력을 파견할 구실로 삼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본다.
2. 1. 한국 독립군의 만주 결집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에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독립군 부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8][9][10] 이들은 만주를 거점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같은 해 8월,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지린성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북로군정서는 자체적으로 사관연성소를 운영하며 병력을 양성하였다.1920년 10월 2일, 독립군은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은 동만주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6일 지린성 성지사로부터 동지린에서의 군사 행동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11][12][13]
2. 2. 일본군의 간도 출병 계획
1920년 일본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26] 일본군의 훈령은 “해외로부터 무력진입을 기도하는 불령선인단에 대하여는 이를 섬멸시킬 타격을 가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이 만주의 독립군 섬멸임을 분명히 했다.[26]일본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출병의 명분으로 삼았다.[26] 일본군 제19보병사단 간부는 비밀리에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長江好)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26] 1920년 10월 2일 새벽, 400여 명의 마적 떼가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분관과 소속 관사를 방화하고 일본인 등을 납치했다.[26]
일본은 즉각 대군을 투입했는데,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출동 부대 등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었다.[26] 이는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 이후 높아진 한국 독립군의 사기를 꺾고, 일본의 압력을 받는 중국 측 행정기관들의 탄압과 비협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26] 장쭤린은 일본 측의 제의에 머뭇거렸으나, 결국 중·일 합동수색대가 편성되었다.[26] 그러나 길림성장 서정림(徐鼎霖)은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는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26] 서정림은 특히 조선인 독립군이 중국인이나 기타 민간인, 자국 교포들을 함부로 약탈, 방화하거나 강탈해가지 않는 점을 이유로 들어 중국 측이 한인 독립군을 토벌하거나 추방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1920년 7월 11일 노두구에서 일본 영사관 병력이 홍범도의 소규모 중대에게 전멸당하자, 일본은 중국 정부에 항의했고, 7월 16일 주조선 일본군 참모장 오노(大野) 등은 다시 심양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했다.[26]
2. 3. 중국군의 입장과 독립군 지원
만주 군벌 장쭤린은 일본의 '중·일 합동수색대' 편성 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길림성장 서정림은 "불령선인은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이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했다.[26] 서정림은 조선인독립군이 중국인이나 민간인, 자국 교포를 약탈하거나 방화하지 않는 점을 들어 중국이 독립군을 토벌하거나 추방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26]그러나 일부 중국 군벌은 일본군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 보병단장 맹부덕(孟富德)은 한국인 독립군과 비밀 협상을 통해 독립군의 무장 해제 대신 조용한 이동을 요구했다. 1920년 8월 초 비밀 협상에서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에서 군인 복장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진하지 않는다. 중국군은 토벌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에 합의했다.[26]
3. 독립군 부대의 편성 및 이동
1919년 8월 서일, 김좌진 등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만주 북부 일대에서 활동했다.[6]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를 운영하며 이범석 등 교관들에 의해 병력을 양성했다.[6] 1920년 6월 당시 군정서 간부로는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 있었다.[6]
1920년 8월, 일본군의 간도 출병 계획을 통고받은 독립군 부대들은 봉천성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6] 북로군정서는 지린성에서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 일부와 합류 후 백두산 주변 밀림에 새 독립군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 10월 초순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다.[6] 이후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 간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했다.[6]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안무의 국민회군 등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했다.[29][30] 이들은 일본군 추격을 피해 이도구, 삼도구로 이동했다.[29]
독립군 연합 부대의 병력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다음 표와 같이 추산된다.
부대 | 최소 병력 | 최대 병력 | 주요 지휘관 | 비고 |
---|---|---|---|---|
북로군정서 | 700명[34] | 2,500명 |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 보병대 450여 명, 연성대(사관생도) 150명, 기타 100여 명[34], 전원 일식 보총, 프랑스제 기관총 보유. |
대한독립군 | 300명[29] | 1,400명[36] | 홍범도 | |
대한국민회 (국민군) | 200명[32] | 500명[30] | 안무 | 군총 400정, 권총 150정, 수류탄, 탄약 보유.[30] |
의군부 | 150명[35] | |||
한민회 | 200명[35] | 500명[32] | ||
광복단 | 200명[35] | 450명 | 이범윤(명의상), 김성극, 홍두식, 황운서 | 군총 150정, 권총 200정 무장.[31] |
의민단 | 200명[35] | |||
신민단 | ? | 1,100명[29] | ||
총계 | 최소 3,000명 | 최대 4,700명 |
이들 외에도 약 1,000여 명의 비전투원이 독립군을 지원했다. 독립군은 일식 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3. 1. 북로군정서
1919년 8월 서일, 김좌진, 이장녕(李章寧), 김규식, 최해(崔海), 정훈(鄭勳), 이범석 등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만주 북부 북만주 일대에서 주로 활약하였다.[6] 북로군정서는 자체적으로 사관연성소를 운영하고 교관 겸 연성대장 이범석 등 소수 교관들에 의해 병력이 양성되고 있었다.[6] 이들은 만주와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지린성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본부에서 약간 떨어진 야산 구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 운영하였다.[6]1920년 6월 당시 군정서의 간부로는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 1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1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이었고 그밖에 김규식(金奎植), 이장녕, 최해, 정훈 등이 직책을 맡고 있었다.[6]
1920년 8월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군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계획이 있음을 비밀리에 통고받은 한국인 독립군부대들은 서서히 군사를 봉천성의 경계지역인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6]
북로군정서도 지린성 북방에서 안도현(安圖縣)으로 이주하여 서로군정서 일부와 합류한 다음 다시 남하하여 백두산 지역 주변 밀림에 길지를 봐둔 뒤, 새 독립군 기지를 새로이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짐을 꾸려서 이동을 시작하였다.[6]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10월 초순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였다.[6] 청산리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 부대와 연합,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하였다.[6]
3. 2. 대한독립군 및 연합 부대
봉오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했다.[29][30] 안무의 국민회군,[30] 한민회군, 의군부군,[32] 광복단군,[31] 의민단군, 신민단군[33] 등 다양한 독립군 부대들이 홍범도 부대에 합류했다. 이들 연합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29]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20년 10월 10일경 안무의 연합 부대는 이도구 부근의 간도 유동(柳洞)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그 병력은 홍범도 부대와 합쳐 약 1,950명에 달했다.[29]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과 왕삼덕(王三德)의 보고에 따르면, 대한독립군 병력 500명을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군 400명, 한민회(韓民會)군 500명, 광복단군 200명 등 총 1,700명으로 추산했다.[30]
부대명 | 병력 | 주요 무장 | 비고 |
---|---|---|---|
대한독립군 | 300명[29] (일제 측 기록) 또는 500명[30] (임시정부 측 기록) | 홍범도 지휘 | |
국민회군 | 250명[29] (일제 측 기록), 400명[30] (임시정부 측 기록), 500명[30](일제 측 다른 기록) | 군총 400정, 권총 150정, 수류탄 및 탄약 다수[30] | 안무 지휘, 봉오동 전투 이후 병력 증가 |
한민회군 | 200명[29] 또는 500명[32] | 혼춘 지방에 본영 | |
의군부군 | 100명[29] 또는 150명[32] | 이범윤을 총재로 추대, 왕청현 춘화향 초모정자에 본영, 허근 단장, 강창대 부단장 | |
광복단군 | 100명[31], 200명[30], 300명[31], 450명[31] | 군총 150정, 권총 200정 (300명 기준)[31] | 대한제국 복벽주의, 이범윤 단장 (명의상), 실제 운영은 김성극, 홍두식, 황운서 등이 담당 |
의민단군 | 200명 | 군총 200정 | 3·1 운동 직후 천주교인 의병 중심으로 조직, 간부는 방위룡과 김연군, 창험대로 알려짐 |
신민단군 | 200명 | 군총 160정, 권총 50정, 수류탄 3상자 | 3·1 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톡에서 기독교 신도 중심으로 조직, 단장 김준근, 부단장 박승길, 사령장관 양정하 |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만주를 떠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34] 홍범도의 대한군북로군 부대는 만주에 남아 있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 북로군정서 부대를 찾아 화룡현 청산리로 향했다.[34]
3. 3. 독립군 병력 규모
독립군 연합 부대의 정확한 병력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추산된다.부대 | 최소 병력 | 최대 병력 | 주요 지휘관 | 비고 |
---|---|---|---|---|
북로군정서 | 700명[34] | 2,500명 |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 보병대 450여 명, 연성대(사관생도) 150명, 기타 100여 명[34], 전원 일식 보총, 프랑스제 기관총 보유. |
대한독립군 | 300명[29] | 1,400명[36] | 홍범도 | |
대한국민회 (국민군) | 200명[32] | 500명[30] | 안무 | 군총 400정, 권총 150정, 수류탄, 탄약 보유.[30] |
의군부 | 150명[35] | |||
한민회 | 200명[35] | 500명[32] | ||
광복단 | 200명[35] | 450명 | 이범윤(명의상), 김성극, 홍두식, 황운서 | 군총 150정, 권총 200정 무장.[31] |
의민단 | 200명[35] | |||
신민단 | ? | 1,100명[29] | ||
총계 | 최소 3,000명 | 최대 4,700명 |
이들 외에도 약 1,000여 명의 비전투원이 독립군을 지원하며 물자 수송, 보급, 자금 및 무기, 탄약, 식량 조달 등의 업무를 맡았다.
독립군은 일식 소총을 주력으로, 기관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4. 전투의 전개 과정
1919년 8월 서일, 김좌진 등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사관양성소를 운영하며 병력을 양성했다. 1920년 6월 당시 군정서 총재는 서일,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1]
1920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일본군은 아즈마 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 23일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어랑촌(율랑촌)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사상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다. 전투 결과 한국군은 이 지역에서 철수했고, 일본군은 이들을 계속 추격했다.
10월 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며 고동하 상류로 이동하였다. 이범석은 만록구에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홍범도 부대는 10월 25일 밤 고동하 계곡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승리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군이 독립군과 교전 중 여러 차례 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했다. 특히 10월 18일과 완루구 전투에서 이러한 오인 사격이 발생했다.
4. 1. 주전론과 피전론의 대립
1920년 10월 19일 서일,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 등 독립군 지도부는 회의를 열고 만주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 19사단 예하 여러 연대가 온다는 소문에 따라 소수 병력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하다는 피전론이 맞섰다.[1] 여러 차례 회의 끝에 피전론이 채택되었다.[1]그러나 이미 일본군 동지대 37여단과 19사단, 20사단, 포조군 예하 사단 병력들이 부근까지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 부대 지도부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1]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의 동태를 계속 파악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을 주저했으며, 후퇴하더라도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결심하였다.[1]
4. 2. 백운평 전투 (1920년 10월 21일)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선발 보병 1개 중대가 백운평에 진입했다. 야스가와 부대원 90여 명이 백운평 안으로 들어섰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 지점에서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경, 매복해 있던 독립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 부대 200명은 교전 20분 만에 큰 피해를 입었다.[28]일본군은 표적이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나, 독립군은 이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여 사격했다. 결국 일본군은 200명 정도가 사망하고 도망쳤다.[28]
뒤이어 야마다(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야마다 토벌대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 측 피해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개 부대를 편성해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 공격하려 했으나, 골짜기 아래에서의 일본군 사격은 불편했고, 높은 고지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은 유리하였다.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패주했다.
고지대에 오른데다가 지형, 지물에 은폐한 독립군을 아래에서 찾아서 쏴야 했던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다.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고 전하고 있다.[26]
4. 3. 완루구 전투 (1920년 10월 21일 ~ 22일)
1920년 10월 21일 오후, 일본군이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까지 완강하게 저항했다.[36] 홍범도 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끝내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고 승리했다.[36]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집중 공격,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4. 4. 갑산촌 전투 (1920년 10월 22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甲山村) 부근으로 이동하여 10월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기습하여 섬멸하였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연이어 승리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다.[26]4. 5. 천수평 전투 및 어랑촌 협공 작전 (1920년 10월 22일)
1920년 10월 22일 새벽, 김좌진 부대는 갑산촌에서 합류하여 주민들로부터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동이 트기 전,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 기병중대를 포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들은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던 아즈마(東正彦) 부대의 일부였다.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같은 날 아침,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에 들어왔고,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큰 타격을 입혔다.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했다.[26]
같은 날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는 어랑촌에서 일본군 동지대와 결전을 벌였다. 오전 9시, 3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대대 간의 전투는 저녁 7시경까지 계속되었다. 독립군들은 촌락 아낙네들이 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26]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 야산 고지로 이동시켰으나,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이 포위 공격을 해왔다. 이때 홍범도 부대가 김좌진 부대를 도와 전투에 참가,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김좌진 부대의 탈출을 도왔다.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자 일본군은 퇴각했고, 일본군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26] 독립군은 소규모 분대로 나누어 이동했고, 북로군정서와 대한군북로독군부군은 일본군 수색대를 따돌리고 어랑촌을 빠져나갔다.
일본 원정군에 참가한 일본군은 일본으로 귀환 중이던 제19사단 제28여단과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던 제11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 부대였다. 실제 군사 작전을 펼친 것은 조선군 예하 제19사단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봉쇄와 시위에 그쳤다. 제19사단은 훈춘(이소바야시 부대), 왕청(기무라 부대), 옌지-룽징 (아즈마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소바야시 부대와 기무라 부대는 별다른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여 바이윈핑(白雲坪), 취안수이핑(泉水坪), 완로우거우(完樓溝)에서 공격, 게릴라전을 펼쳐 승리했다. 패배한 일본군은 아즈마 부대에 지원을 요청, 아즈마 부대는 잔여 병력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과 교전했다.
10월 23일,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율랑촌(漁郎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은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수천 명을 부상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사상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다. 전투 결과 한국군은 철수했고 일본군은 추격했다.
송진우는 일본군 사상자 수가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독립군이 일본군과 조우했을 때 10번 중 9번을 패했으며, 승리하더라도 2~3명의 일본군만을 사살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6. 만록구 전투 및 고동하 전투 (1920년 10월 23일 ~ 26일)
10월 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 상류로 이동하였다. 이범석은 만록구(萬鹿溝) 일대에 말똥을 대량으로 뿌려두었다.[26] 일본군 척후병은 이를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판단, 일본군 주력부대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독립군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1,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흩어지자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평지 교전은 불리하여 10월 23일부터 이틀 간 만록구 고지에서 백병전을 펼쳐 일본군을 퇴각시켰다.[26]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10월 25일 밤 고동하 계곡에서 독립군 야영지를 급습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이미 고동하 계곡 사방 산정에 매복 중이었다. 습격당한 독립군은 전열을 수습한 뒤 일본군과 교전, 신속히 대피하였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고동하 계곡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26]
독립군은 산중으로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26]
4. 7. 일본군의 오인 사격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는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2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공식 보고서가 아닌 독립신문에서는 논평을 내고 일본군의 오인 사격을 조롱하였다.10월 18일에도 일본군은 자국 군끼리 오인사격을 가했다고 한다.[37] 박은식은 18일의 일본군이 자국 군끼리 싸우는 것을 증언하였다. 박은식에 의하면 10월 18일 밤중, 일본군은 독립군이 분명히 이도구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서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좌우를 순회하다가 갑자기 자기네끼리 마주치고는 이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발포하여 사망자가 180명, 부상자가 70명이나 되었다.[37]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다.[37]
박은식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실수를 한 다른 기록도 남겼다. 1920년 10월 21일 밤부터 10월 22일 새벽까지 이도구에서 홍범도군과 교전한 일본군 역시 자신들끼리 서로 교전하여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36]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 역시 현장 목격담을 듣고 이를 증언하였다. '적(일본군)의 구원부대가 도착하여, 아군(독립군 연합부대)이 이미 퇴각한 줄도 모르고 포위하여 불을 놓았다. 남북 양방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대를 잠복시켜 엿보도록 하였지만 아군의 소리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38] 그러자 저들 양 방향의 일본 매복 병사들이 서로 알리지도 않고 길을 나누어 수색하다가 또다시 자기네끼리 서로 충돌하여 사상자가 200명이나 되었다[38]'고 진술하였다. 박은식은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전사하자,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한국인 독립군이 이들의 무기를 노획해갔다고 한다.
박은식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인 독립군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죽은 일본군의 손목에서 손목시계[38]까지 빼갔다.'고 한다.
다만, 청산리 전투 때는 같은 화룡현 관내에서 벌어졌던 봉오동 전투 때와는 달리 기상 이변이 없었고 지형이나 주변 환경의 악영향이 없었는데도 일본군 부대는 실수로 자국 군끼리 교전을 했다. 그러나 후에 일본군은 군복을 바꾸지는 않고 관계자들을 문책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일본군이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오인사격하다가 자멸한 것은 박은식의 증언처럼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었다.[37]' 한편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참고하여, 자신들이 마련한 군 자금 중 일부로 일본군 복장과 계급장, 일본군이 쏘는 소총 등을 계속 구입하여 일본군으로 위장하여 움직이기도 했다.
5. 전투 결과 및 영향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투 결과에 대한 양측의 주장은 크게 엇갈린다.
한국 측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를 1,200명에서 3,300명으로 추산하는 반면,[36] 일본 측은 전사자가 11명, 부상자가 24명이라고 주장한다.[39] 이는 일본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근거로 한다.[39] 송진우, 김학철 등은 한국 측의 전과 과장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4][5][14][15][20][21]
청산리 전투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가해 독립군을 압박했고, 독립군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했다.[41] 이 과정에서 만주의 한인 독립군 결집체와 연대는 해체되었다.[41] 이후 만주에서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이 활동했으나, 1930년대 중반 일본의 공세에 밀려 중국 본토로 퇴각해야 했다.[42]
5. 1. 전사상자 논란
한국 측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를 1,200명에서 3,300명으로 추산한다.[36] 일본 신문에 일본군 가노 연대장이 전사하고,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전사자 900여 명이 전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주장하며,[40] 최소 하사관 이하 전사자를 9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사자는 130명, 실종자는 200여 명, 부상자는 90여 명 정도였다.[36][40]그러나 일본 측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1명, 부상자는 24명이라고 주장한다.[39] 일본 군사 사학자 사사키 하루타카(佐々木春隆)는 일본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39] 또한, 일본군 기병 연대장 전사자 목록에 가노 노보테루의 이름이 없으며, 1922년까지 군 생활을 한 기록과 간도출병사에 1920년 11월 가노 대좌가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한국 측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송진우는 일본군 사상자 수가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한국 독립군이 일본군과 조우했을 때 10번 중 9번을 패했으며, 승리하더라도 2~3명의 일본군만을 사살할 수 있었다고 한다.[4][5] 김학철 또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300배 이상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14][15][20][21]
안정근의 보고에 따르면 10월 23~25일간 양측 피해가 300여 명이라고 하며, 장세윤은 이를 토대로 일본군 사상자는 400~500명 선이고 독립군도 이에 맞먹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추산했다.
박은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1920)는 "가노 연대장 이하 900여~1,600여 명",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편찬 『대한민국 정당사』(1964)는 "천여 명",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1967)는 "사상 3,300명",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1975)는 "가노 연대장 이하 3,300명"으로 일본군 피해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규모가 과장되는 경향을 보인다.
5. 2. 만주 독립군 활동의 위축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독립군을 토벌하게 했다.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다.[41] 이로서 만주의 한인 독립군 결집체와 연대는 해체되고 만다. 그 후 만주에서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활동하다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로 개편되고 한족총연합회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북만주와 동만주에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만들어 남만주에서 활동했다.[42] 그러나 이들은 모두 1930년대 중엽 일제의 공세에 밀려 중국 본토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42]1921년 1월 26일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43]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43] 이범석 등도 이들을 따라갔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 주 자유시(알렉셰프스크)란 곳으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43]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43] 한편 김좌진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만주로 되돌아와 적화방지단을 만들어 반공의 일선에 섰다.[42]
5. 3. 이범석의 회고록 왜곡 논란
이범석은 자신의 회고록 《한국의 분노》에서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군 단독의 전과라고 주장했다.[41] 그는 이후 《우둥불》이라는 다른 회고록에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이 역시 왜곡으로 밝혀졌다.[41] 실제로는 전투 초반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다른 독립군 부대들이 전술적 후퇴를 하였으나,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결심했다. 그러나 벽오동 전투 승전 후 전투를 피하던 홍범도 부대와 다른 독립군 부대 역시 어랑촌 전투부터 가담하여 함께 싸웠다.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컸다.[34] 당시 상해 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1]
6. 평가 및 의의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6. 1. 한국 독립운동사에서의 중요성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완린 작가는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라고 말했다.[1]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이광수는 청산리 전투가 오히려 간도 참변을 야기했다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1]6. 2. 중국 및 국제적 관점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완린 작가는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라고 말했다.[1]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이광수는 청산리 전투가 오히려 간도 참변을 야기했다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6. 3. 논란과 비판
이광수는 청산리 전투가 간도 참변을 야기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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